[아프리카 여행 40일] 시리즈 3 > 탄자니아 잔지바르의 성공회 성당과 노예무역 전시관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다

 아프리카 여행의 첫 관광지라 할 수 있는 탄자니아 잔지바르의 성공회 성당과 노예 감금소. 첫 관광지가 어둡고 잔혹한 역사의 현장이라니. 하지만 아프리카에 와서 흑인 노예의 역사를 외면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아프리카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노예 무역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기에 일찌감치 그 현장을 마주한 것이 어쩌면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1. 잔지바르의 노예 역사의 상징, 성공회 성당

잔지바르 스톤타운 중심에 위치한 성공회 성당 외관. 과거 노예 시장 터 위에 세워진 역사적인 건물.
잔지바르 스톤타운의 성공회 성당 전경



잔지바르 스톤타운 중심부에 위치한 성공회 성당(Anglican Cathedral)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니라,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과거 동아프리카 최대의 노예 시장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영국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의 노예무역 철폐의 뜻을 기려 건립되었습니다.

잔지바르는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과 연계되어 성공회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지역이었는데, 영국의 선교사이자 반 노예 운동가였던 에드워드 스티어 주교가 설계했고 1873~188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고딕 양식과 스와힐리 해안의 전통 양식이 혼합 됐다더니 외관도 그렇고 창문, 출입문 등이 어쩐지 이슬람 양식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2. 잔지바르 성공회 성당 내부의 경건함과 리빙스톤 십자가


아치형 천장과 빛이 드리우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인 교회 내부. 왼쪽의 나무십자가는 리빙스턴을 기리는 십자가이다.
잔지바르 스톤타운의 성공회 성당 내부와 리빙스톤 십자가


내부로 들어서면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따뜻한 빛을 쏟아내며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건축 양식은 유럽 고딕 양식과 스와힐리 해안의 전통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입니다.

교회 내부 왼쪽 앞 기둥에는 리빙스톤 십자가(Livingstone’s Cross)가 걸려 있는데요, 이 십자가는 탄자니아 본토의 리빙스톤 묘지 옆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아프리카 내륙 탐험과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던 리빙스톤의 숭고한 뜻을 기립니다.


3. 리빙스톤 십자가에 얽힌 진짜 이야기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은 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며 노예무역 종식을 위해 헌신했지만, 1873년 탄자니아 본토의 치타마(Chitambo)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은 영국으로 운구되었지만, 심장과 내장은 현지인들이 ‘아프리카에 남겨야 한다’고 하여 탄자니아 본토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잔지바르의 주민들이 잔지바르 노예시장 근절을 위해 애썼던 리빙스톤을 기리고 싶어서, 탄자니아 무덤 자리에 있던 뮐라(Mvula) 나무의 가지를 잘라 일부는 영국으로 가져갔고, 일부는 잔지바르로 옮겨와 성공회 교회 안에 ‘리빙스톤 십자가’로 제작·보관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 십자가는 리빙스톤의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기념물이자, 그가 평생 싸운 노예제 종식 운동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4. 노예 석상(MEMORY FOR THE SLAVES)


성공회 성당 마당에 있는 노예 석상
성공회 성당 마당에 있는 노예 석상


교회 마당 한쪽에는 노예 석상(Memorial Sculpture)이 자리합니다. 목 쇠고리와 사슬은 실제 유물과 동일하게 재현되었으며, 잔지바르가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동아프리카 해안을 통해 7~19세기 말까지 약 2,000만명의 노예들이 아라비아 반도, 인도,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유럽, 미국 등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 석상의 표정이 어찌나 생생한지 그들의 아픔이 전해오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잔혹한 일이 우리 지구에서 일어나질 않길 바랄 뿐입니다.


5. 노예무역 전시장(노예 감금소)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수십 명이 감금되었던 노예 감금소.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노예 무역 박물관의 노예감금소


교회 옆 지하에는 노예 감금소(Slave Chambers)가 남아 있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 수십 명의 노예가 경매 되기 전까지 갇혀 있었으며, 무더위와 환기 부족 등으로 질병에 걸려 사망할 수 밖에요.

지금도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느끼게 합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수십 명이 감금되었던 노예 감금소.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노예 무역 박물관의 노예감금소


이 좁은 공간에 70명이 어떻게 들어앉았을까요?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낮은 천정, 발목과 목을 조이는 쇠사슬 찬 채로 겹겹이 쌓여 있었단 말인데, 상상만으로도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데 그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이 노예 감금소에서 거의 반은 죽고, 살아남은 노예들은 상인에게 팔려 다시 노예선을 타고 인도양을 건너거나 대서양을 건너는 머나먼 바닷길을 떠나야 했대요.  약 2000만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배를 타고 수송되었다니 아프리카 전역에서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가족과 헤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에 몰렸을까요. 

노예선의 수송 과정은 한 번 쯤 들어보셨을 거에요. 선창 바닥에 선반을 층층이 설치해서 그 사이사이에 벌거벗은 흑인들을 사슬에 묶은 채 눕히는 식이었으니, 살아 있는 사람을 물건 취급한 거나 다름 없죠.

이러니 도착지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최대 70%였다니 아주 건강한 노예만 생존했다는 건데요. 현대의 흑인들이 스포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그 노예들의 생존 투지와 끈기, 그리고 건강한 신체의 유전자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학자들도 있대요. 

그럼, 왜 유럽인들은 노예가 필요했을까요? 

유럽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플랜테이션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예 무역이 시작되었답니다. 더욱이 17~18세기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노예 무역이 정점을 이루었고요. 그러다 1807년 영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노예 무역을 법안으로 통과시켰고, 이후 1815년 스페인, 포루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도 노예 무역을 중단하게 됐지만 한동안 불법 노예 무역이 진행됐대요. 

서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팔린 노예들은 유럽과 북미로, 잔지바르에서 팔린 노예들은 주로 중동과 인도로 끌려갔답니다.


6. 여행 팁

  • 위치: 잔지바르 스톤타운 중심부

  • 관람 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 입장료: 노예무역 박물관 약 5~10 USD (가이드 포함) / 성공회 성당은 무료

  • 추천 관람 순서: 교회 내부 → 리빙스톤 십자가 → 노예 석상 → 노예 감금소



🌍제 아프리카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포스팅은 오늘 포스팅한 성공회 성당을 제외한 스톤타운 시내 투어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톤타운의 골목 등 잔지바르의 이모저모를 볼 수 있답니다.

다음 편도 함께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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